Buoys


Kichang Choi

9. Dec. 2023 ~ 2. Feb. 2024


자리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길을 찾기 위해 표류하는, 


부표는 물에 떠 있는 표식입니다. 그것은 드넓은 바다에서 이정표가 되기도 하고, 특정한 영역을 표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위험한 지점을 알리기 위해 떠 있기도 합니다. 파도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의 표면에서 부표는 자신의 위치를 고정하고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지닌 바다에서 부표들은 그 힘에 몸을 맡긴 채 떠 있죠. 망망대해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에서 부력을 얻으려면 물보다 밀도가 낮아야 합니다. 무언가 표지해야 하기 때문에 견고하지만, 무조건 단단한 것이 아니라 형태를 잘 유지할 수 있는 정도로 세심히 조정된 밀도가 필요하죠. 의도된 가벼움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불어 부표들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파도를 따라 넘실거리죠. 어딘가에 꽉 매여있다면 움직이는 바다에서 부표는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가볍기 때문에 자리를 지키는, 고정되기 위해서 움직이는 역설에 대해 생각합니다.


예술가 최기창의 2009년 작업부터 가장 최근 작업까지 돌아보는 전시에 붙은 ‘부표들’이라는 낱말은 다양한 층위에서 그 자체로 부표가 됩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업들은 최기창이 만들어온 세계의 영역을 표지하는 일종의 부표라고 볼 수 있죠. 그리고 부표의 속성을 통해 그의 작업 방법론을 유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최기창은 가벼워 보이는 대상의 밀도를 세심히 조정해 전혀 다른 영역으로 밀어붙이곤 합니다. 유행가나 군가에서 다뤄지는 너무도 가벼운 사랑 이야기를 이상한 방식으로 응축시켜 사랑이라는 근원적인 개념을 돌아보게 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런 방법론은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초기작 〈반달〉에서부터 드러납니다. 〈반달〉은 보름달 이미지가 붙어 있는 장치인데,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온전한 구의 형태가 아니라, 반이 잘린 구 형태를 가지고 있죠. 얼핏 실없는 농담처럼 보이지만, 학습된 이미지와 언어의 구조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반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죠. 달은 항상 어느 쪽도 상실하지 않은 채 온전한 형태로 지구 주변을 돌고 있지만, 지구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이니까요. 작업이 자아내는 헛헛한 웃음은 시나브로 사물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연결됩니다.


가벼운 대상을 무거운 성찰로 뒤바꾸는 작업은 〈루돌프〉에서도 이루어집니다. 1945년 미국에서 출시된 애니메이션 〈루돌프 사슴코〉(Rudolph The Red-Nosed Reindeer)의 영상을 그대로 사용한 작업이죠. 잘 알려진 루돌프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것인데, 1940년대 특유의 프로파간다 풍이 인상적입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돌아보면 순록들이 군대처럼 묘사되는 모습이나, 어린이로 그려지는 루돌프가 산타클로스에게 동원되는 모습이 기이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최기창은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사용하면서, 오로지 루돌프가 밝은 코를 사용하면 할수록 그의 눈이 점점 밝아지게 만드는 간단한 조작으로 개입합니다. 후반부에 루돌프가 산타클로스에게 상을 받는 장면에서 그의 눈은 무섭게 빛나며 화면을 가득 채워버리죠. 내용은 그대로인데 영상은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합니다. 무언가 작은 요소를 과도하게 응축시켜 파열시키는 힘에 대해 생각합니다.


2018년 광주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작업 〈더, 한 번 더, 그걸로는 충분치 않아〉에서는 밀도를 이상한 방식으로 조정하는 방법론이 더욱 극적으로 사용됩니다. 그것은 국가, 군가, 유행가와 찬송가 약 1,500곡에서 추출한 사랑에 대한 가사를 8m가 넘는 벽에 새겨 넣은 작업이었습니다. 세속적인 것, 성스러운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 등 온갖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강박적으로 계속 늘어놓으니 개별적인 노래의 가사 안에서는 평면적이었던 사랑 이야기가 파열적으로 산란되면서 사랑이라는 문제를, 혹은 세상이 사랑을 다루고 있는 방식 자체를 재고하게 됩니다. 이 작업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전시장 1층의 전면 창 전체를 반짝이는 시트로 뒤덮는 방식으로 재제작되었습니다. 외부에서는 화려하게 빛나지만 내부에서는 그림자로 드리워지는 역설이 작업을 또 다시 다른 각도에서 흥미롭게 작동시키죠.


이런 식으로 원래 맥락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요되거나 싸구려 감성에 불과했던 사랑이더라도 최기창의 작업에 차용되면 기이한 무게를 가지게 됩니다. 그외에도 철판에 사랑을 노래하는 가사를 짧게 옮겨오는 연작은 “아,” 같은 단말마로 그것을 응축하곤 하는데, 이 작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 글자가 부식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녹슬고 있는 사랑의 노랫말은 영원이나 맹세 같은 것의 허울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철이 한번 녹슬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그 사물의 속성 자체를 바꾸어 나간다는 점이 핵심적입니다. 단지 표상적인 언어나 이미지의 차원이 아니라, 물질적인 차원에서 사랑의 근원적인 속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게다가 철판에 적힌 모든 구절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로 끝이 나는데, 이는 철판이 계속 녹슬어가는 것처럼 결코 완결되지 않고 이어지는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술 작업의 차원에서도 완성이라는 고정된 상태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물질의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와 연결되기도 하죠.


최기창의 작업에서 녹이 슨 철판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피에타〉는 그의 작업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표 중 하나로 둥둥 떠 있는 작업입니다. 최기창의 〈피에타〉는 미술사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표라고 할 수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그대로 반복합니다. 물론 그것을 녹이 슨 철판에 120개 조각으로 분절해서 말이죠.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바티칸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 〈피에타〉가 아닙니다. 그것이 미술사 교과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판, 그러니까 너무도 흔하게 접할 수 있는 하나의 사진이라는 점을 짚어야 합니다. 바티칸에서 관광객들과 함께 긴 줄을 서서 저 멀리 유리 너머에 있는 실제하는 조각-물질로서의 〈피에타〉가 아니라, 하나의 렌즈로 특정한 각도에서 찍은 사진 〈피에타〉는 그것을 둘러싼 우리의 선입견과 서양 중심 미술사라는 체제 전체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수없이 유통된 그 이미지는 최기창의 작업에서 120개 조각으로 분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높이 2m가 넘는 크기로 확대되어 전시장의 스케일에서 가까이 다가가 살피면, 망점이 그대로 드러나며 그 형태가 추상으로 수렴해 버립니다. 녹슨 이미지를 통해 특정한 상징으로 뒤덮인 작품이 아니라, 닳고 닳은 이미지로 그것을 다시 인식하면, 그 이미지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구축을 다시 끄집어 감각해 낼 수 있게 됩니다.


미술사 도판을 차용하는 작업 이외에도 자연의 연필로서의 사진을 인화가 아니라, 철판에 녹슬게 하는 방식으로 가지고 오는 연작은 사물과의 협업이라는 차원에서도 주목할 만합니다. 〈럭키 드로잉〉 연작에서는 이러한 지점이 더욱 명확해지는데, 작가는 그것은 운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작업에서 자신이 물러나 물질들에게 구성을 위탁하는 것입니다. 〈드로우 드로잉〉에서는 자석을 철판에 던져서 두 물질이 만들어내는 구성을 그대로 받아들여 작업하기도 합니다. 화면을 엄격하게 조정하기보다는 일부러 통제할 수 없는 구석을 만들고, 그것과 협의를 해나가는 것이죠.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론도 마찬가지 입니다. 스프레이 페인트를 사용하면 안료를 얹는 면 가장자리에 자국이 남게되죠. 〈순환하는 밤〉과 같은 연작은 통제할 수 없는 얼룩이나 흔적을 그대로 작업으로 내세웁니다. 명확한 방향을 스스로 제시하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길을 잃고 거기에서 무언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교적 초기작인 〈슈퍼스타더스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작업에 계속 쌓이는 먼지를 이물질로 취급하여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신의 예술 작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여기 있습니다. 단지 유물론이나 행위자, 객체지향 같은 말로 포착할 수 없는, 특유의 예술적 방법론이 여기에서 발견됩니다. 


최기창은 부표를 띄웁니다. 부표를 띄우는 것은 바다라는 거대한 환경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분명히 어떤 영역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단단한 땅을 딛고 자신이 정한 어딘가로 향하는 것보다,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액체에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궤적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길을 찾기 위해 표류하는, 고정되기 위해 움직이는, 한사코 완결을 내버리지 않는, 그런,


글: 권태현(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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